논 이야기
구한말 한덕문의 아버지 한태수는 부지런한 농군으로 논 스무 마지기를 장만하였는데 고을 원에 의해 동학란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논 열세 마지기를 빼앗깁니다. 이 일로 인해 한덕문은 반소작농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일제 강점기를 맞이합니다. 이후 살림도 어려운 상황에서 술과 노름으로 인해 빚이 늘자 시세의 곱절을 준다는 일본인 길천에게 남은 논 일곱 마지기와 멧갓을 팔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계획과 달리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는 시세가 올라 버린 논을 되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후회하지만 일인들이 쫓겨 가면 판 땅을 돌려받을 수 있다며 주위에 큰소리를 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허황된 생각을 비웃었으나 정말로 시간이 흘러 독립이 되자 한덕문은 논을 되찾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그러나 길천에게 함께 팔아넘겼던 멧갓이 그 관리인에게 돈을 주고 사들인 영남의 수중에 넘어간 사실을 알고 분노하게 됩니다. 또한 논도 나라에 돈을 내고 사야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구장을 찾아갑니다.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한덕문은 독립되었을 때 만세 부르지 않기를 잘했다고 말합니다.
농민들의 고달픈 삶
땅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논은 삶 그 자체입니다. 소설 논 이야기의 핵심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던 농민들이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논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발입니다. 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농민이었던 주인공 한덕문은 구한말에는 고을 원에게 억울하게 논을 빼앗기면서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가난과 무지로 조선의 땅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는 일본인에게 얼마 남지 않은 논마저 팔아 버리고 맙니다. 광복이 되자 한덕문을 비롯한 농민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소작 제도 아래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소작료를 내고 나면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불합리한 제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변화도 농민들에게 진정한 광복일 수는 없었습니다. 농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되자 일본이 빼앗아 갔던 논에 대한 소유권은 친일파 세력에게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논 이야기는 농민들의 가장 절박한 삶의 문제가 광복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개인 모두를 향한 풍자
논 이야기는 광복이 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욱 활개를 치는 시대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한말부터 국가는 농민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으며 농민들은 오히려 국가로부터 수탈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해 왔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농민들은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논밭을 수탈당했으며 광복이 되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시점에서도 역시 그들은 소작농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민중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정부의 잘못된 토지 개혁 정책을 비판하고 풍자합니다. 한편 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국가의 독립조차 의미가 없다는 한덕문의 사고방식은 그의 게으름과 어리석은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을 보이고 있으며 한덕문의 인식은 작품에서 풍자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덕문은 구한말 이전의 사회 체제나 식민 지배하의 사회 체제나 농민에게는 하나도 득 될 것이 없다는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소설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입니다. 잘못된 행실로 인해 논을 팔고 광복을 이해타산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헛된 기대를 품는 한덕문을 작가는 풍자의 대상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인에게 뚜렷한 해악을 끼치지는 못하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광복이 된 조국에서는 그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농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 일본인 소유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려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통제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농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덕문이 국가에 대해 왜곡된 가치관을 지니게 되는 과정이나 해방 직후 토지 분배 정책에서 소외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작품에서 궁극적인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인공이 살아온 부조리한 사회 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역사 속에서 변함없이 핍박받고 수탈당해 온 민중에게 국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