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비극적 서정미를 품은 달밤의 이태준과 그 속의 관찰자

by 깊은쌤 2024. 4. 24.

원배달부가 되길 소망하는 황수건과 나의 첫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작가의 삶과 문학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이문교의 일남 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개혁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쫓기는 몸이 된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족들과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도중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는 함경북도 이진에 정착한다. 삼 년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된 이태준은 철원으로 돌아가 친적집을 떠돌며 길러지게 된다. 철원에서 보통 과정인 봉명학교를 졸업한 후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결심으로 가출하였다. 원산의 객줏집 사환으로 일하는 등의 방황을 거듭하다 거의 고학으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조치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일 년 만에 중퇴하였다. 이때부터 고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태준은 한국 근대 문학의 개척자라 불리는 이광수와 김동인의 뒤를 이어 마침내 근대 문학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태준의 작품은 한동안 남한에서는 읽을 수 없었다. 까닭은 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의 사십여 년 동안 읽지 못했던 이태준의 작품은 1980년대 말에 와서야 겨우 빛을 보게 되었다. 이태준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 성북동 집을 장만해서 월북할 때까지 그곳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달밤과 손거부 그리고 색시 등의 작품만 하더라도 성북동에서 쓴 작품들이다. 현재 성북동 소재 그의 집은 서울시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외종손녀인 조상명 씨가 보존하고 있다. 집 주변의 길을 이태준길이라 이름 지어 그의 드높은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태준의 달밤

성북동으로 이사 온 나는 시냇물 소리와 솔바람 소리 그리고 우둔하고 천진한 품성을 지닌 황수건이란 사람을 만나고부터 이곳이 시골이란 느낌을 받는다. 황수건은 학교 급사로 일하던 중 일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쫓겨나 현재 신문 보조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원배달원이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실속 없는 참견을 하지만 나는 그의 참견을 끝까지 받아 준다. 원배달은커녕 보조 배달원 자리마저 떨어지고 만 황수건은 나에게 하소연을 한다. 나는 그의 처지가 딱해서 참외 장사라도 해 보라고 돈 3원을 주지만 그는 참외 장사도 실패하고 끝내 아내마저 달아나게 된다. 어느 늦은 밤 황수건은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달을 쳐다보며 서툰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를 부를까 하다 그가 무안해할까 봐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다. 쓸쓸한 달밤이다.

비극의 서정미와 관찰자의 시선

달밤은 작가 이태준의 서정적 감수성과 함께 소외된 인물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인간애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우매하면서도 천진스러운 황수건은 현실에서 좌절과 결핍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도태될 뿐이다. 냉혹한 현실과 각박한 세태 속에서 인간적인 삶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반편 취급을 받을 만큼 모자란 인물이며 세태 변화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황수건의 소원은 고작 원배달부가 되는 정도의 소박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황수건이 경험해야 하는 실패는 그로서는 인식하기 힘든 세상의 논리와 관련되어 있다. 근대적 현실의 비정함과 야박함은 그를 일상의 질서에서 점점 소외시키고 서술자는 그러한 황수건에게서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즉 황수건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태도와 심리는 이 작품을 조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작품의 서술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그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의 애상적인 정서가 극대화되는 부분으로 읽는 이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달을 쳐다보며 못 피우던 담배를 물고 노래를 부르며 처량하게 걸어가는 황수건의 모습은 달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풍경과 대비된다. 황수건이 겪었던 상처와 좌절은 은은한 달밤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슬프면서도 서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관찰자와 정서를 공유하며 황수건에게 연민과 감정 그리고 그가 겪어야 했던 현실의 비극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소설은 읽고 난 후 왠지 모를 이유로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