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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사평역으로 가다

by 깊은쌤 2024. 4. 30.

시골 간이역에서 그들은 톱밥 난로를 사이에 두고 과거를 회상한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

소설 사평역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작품은 눈 내리는 역사의 풍경과 막차를 기다리는 여러 인물들의 삶이 서정적 문체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간이역 대합실 안의 다양한 인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기억과 상처 그리고 인생의 고단함은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려야 하는 막막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기차는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 즉 인생의 행로를 암시한다. 또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의 몇 시간은 1980년대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삶의 방향성을 잃은 민중들의 시간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기차를 기다리는 여러 사람이 각자 무언가를 회상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받지 않은 늙은 역장과 노인 그리고 중년의 사내와 청년 등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서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사연 속에서 학생 운동과 감옥살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한 생활 등 당대 서민들의 삶의 방식들 또한 담겨 있다. 사람들은 난로 주위에서 불을 쬐며 서로 대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누군가와 정을 나누거나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지는 않는다. 간이역은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민중들이 잠시나마 모여 함께 몸을 녹이고 또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는 장소로 설정되어 있다. 산골 간이역에서 역사 안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난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물들은 난로의 불빛을 통해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이처럼 난로는 그들에게 작게나마 온기를 주는 대상이자 그들의 회상을 이끌어 내는 기억의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톱밥 한 줌을 집어넣자 타오르는 주황색 불꽃 속에서 청년은 어머니와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다음 톱밥을 넣으면서는 다시 친구들과 노교수의 얼굴을 떠올린다. 청년을 바라보던 중년 사내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허 씨와 같은 얼굴을 떠올린다. 이들은 이렇게 불꽃을 바라보는 연속적인 행위를 통해 짧은 순간이나마 정서적 공감을 형성한다.

 

작품 형식의 이해

대부분의 소설들이 과거형의 시제를 취하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현재형의 시제를 취하고 있다. 마치 작품 속 역장과 같은 동일한 시선으로 독자가 소설 속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소설은 특정한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당시 사회의 주변인들 즉 소외된 인간들의 삶과 그들의 내면세계를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는 한 인간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삶이 아닌 당시 사회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의 삶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고 중늙은이와 노인의 아들 그리고 미친 여자 등과 같은 무명의 호칭 방식으로 표현한 것도 인물의 개성보다는 소외된 인간들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로 해석된다. 소설 사평역처럼 기존의 작품을 재구성하는 문학 활동은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작품의 창조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있다. 시 사평역에서와 소설 사평역을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고려하여 수용하면 우선 두 작품의 공통된 배경이나 상황 등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다. 소설에서 구체화된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시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맥락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시에 나타난 이미지나 표현법 등을 통해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작품 수용의 관점에서 두 작품을 연관 지어 감상하는 것은 좀 더 섬세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소설과 시를 읽는 동안 넓은 시내를 나가기 위해 내가 타던 열차 그리고 역사가 생각났다. 딸깍딸깍 승차표에 잇자국을 내주며 탑승객을 확인하던 그 열차. 그런 어릴 적 경험이 소설을 좀 더 몰입감 있게 읽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