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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 지식인이 남긴 아홉 켤레의 구두

by 깊은쌤 2024. 4. 28.

그가 사람을 찌를 만한 위인이 못 되는 줄 간파했기 때문에 칼을 되돌려 준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떠났고 구두만 남았다.

스무 평짜리 주택에 세 들어 사는 동안 우리 부부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있어 '선생 댁'이라는 호칭으로 통했다. 우리는 호칭과 함께 그들이 보여주는 동경 그리고 지나친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 몇 푼 안 되는 과자 부스러기로 가난한 애들에게 못된 일을 시키는 아들의 비뚤어진 행동은 성남의 고급 주택가에 무리하게 집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재정상의 문제를 다소 메워 볼 생각으로 방을 하나 세놓으려는 과정에서 권 씨 가족이 이사를 왔다. 전세금 20만 원. 그중 10만 원은 아예 내지도 않았고 게다 두 명의 자식 외에 뱃속에 또 한 명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출판사에 다니던 권 씨는 집을 장만해 볼 생각에 철거민 입주권을 얻어 광주 대단지에 20평을 분양받았으나 땅값과 세금 등을 감당하기에 그의 형편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적 소요에 권 씨가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징역을 살다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신의 구두만은 소중하고 깨끗하게 닦는 버릇이 있다. 얼마 후 권 씨 아내가 애를 순산하지 못해 수술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권 씨가 나에게 수술비용을 빌려 달라 절박하게 부탁했고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뒤늦게 나 자신의 이중성을 느끼고 권 씨 아내가 수술을 잘 받도록 해 주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권 씨는 그날 밤 나의 집에 강도로 침입한다. 나는 그가 권 씨임을 알아차렸고 되도록 그를 안심시키는 쪽으로 행동했으나 정체가 탄로 난 권 씨는 "그 따위 이웃은 없다는 걸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아홉 켤레의 구두만을 남긴 채.

산업화 시대의 현실

도시 빈민의 소요 사건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주인공의 이야기로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중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다. 무능력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한 소시민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어떠한 개인의 문제도 사회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또한 한국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윤흥길의 작품 세계는 두 계열로 집약된다. 하나는 어린 시절 6. 25 전쟁의 체험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어른이 된 뒤에 관찰한 현실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여 고발하는 작품이다. 1970년대는 산업화 시대로서 경제 입국의 시대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여러 방면의 변화를 드러냈던 시기다. 그 여파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몰가치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소외되고 병든 변두리 인생의 길을 걷는 인간도 많아졌다. 소설 속 권 씨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전형이다. 오로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 어렵게 삶을 영위하는 권 씨야말로 시대적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기 또 하나 중요한 서술자 나의 자기반성적 태도이다. 전세로 입주한 권 씨와 같이 소외되고 가난한 인간에 대하여 연민 어린 관심 외에는 보여줄 게 없었던 서술자 나의 처지는 작가가 시대의 비극적 현실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방안을 탐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작가 윤흥길은 1977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절도 있는 문체로 왜곡된 역사 현실과 삶의 부조리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묘사하고 있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뇌까지 전이된 폐암으로 남편은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그런 남편의 영정 사진을 준비하기 위해 부부 사진 중 남편의 얼굴만 도려내어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를 위해 모자를 사 주었고 나 또한 선물하면서 남편은 여덟 개의 모자를 갖게 된다. 남아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남편의 죽음을 우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여덟 개의 모자 속에 깃든 추억을 회상하며 남편과 마지막을 함께 한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가 쓰던 모자를 자식이나 조카에게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박완서의 자전적 에세이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제목을 차용한 작가의 회상적이고 독백적인 수필이다. 작품은 죽음을 앞둔 남편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서술자의 시선을 통해 남편과 죽음에 관한 서술자 개인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과의 모습을 통해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 주기도 한다.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이들이 부럽다. 너무나 갑작스레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우리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 아버지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같은 기회가 있었다면 우린 어땠을까. 때때로 그럴 수 있었던 어떤 이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