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주인공은 이중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업가이다. 이중생은 일제 강점기에 큰 재산을 모은 부자다. 그는 친일파로서 외아들 하식을 일본군 지원병으로 자진하여 보내는 등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광복이 된 후 친일파였음에도 이중생은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권력자들과 손을 잡으며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이중생도 결국 운이 다하여 사기와 배임 그리고 횡령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기에 이른다. 재산을 모두 잃을 위기에 몰리자 이중생은 자신을 돕는 사람 중 하나인 최 변호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 재산을 사위인 송달지에게 상속한다는 유서를 만든 뒤 거짓 자살극을 벌인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잊을 때쯤 세상에 나와 송달지의 이름으로 살면 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고 자신의 재산도 지킬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기대로 거짓 자살극을 벌인 것이다.
문제적 인물들
오영진의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광복 직후 혼란한 사회상을 개성 있는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낸다. 죽음을 위장하며 재산을 지키려 하는 탐욕스러운 이중생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일제 강점기 친일을 일삼은 경제 사범이다. 이중생의 변호사인 최 변호사 역시 돈을 위해 지식을 파는 비윤리적인 인물이다. 작품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죽음을 위장하기까지 한 비인간적인 모습을 풍자하며 광복 직후 사회의 혼란함과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를 비판한다. 이중생은 재산을 축적하며 친일 등 반민족 행위를 일삼은 인물이다. 이러한 범죄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탈세와 배임 그리고 횡령 등으로 재산이 몰수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재산을 사위에게 양도하는 유서를 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중생의 부도덕함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한편 이중생의 의도와 다르게 사위 송달지가 재산을 공익사업에 기부하자 이에 절망한 이중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그려 고전 문학의 미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에 이미 풍자가 집약되어 있다. '살아 있는'이라는 표현에서는 죽음을 위장하여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고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이중생의 처지를 드러낸다. 둘째 '이중생'이라는 이름은 이중성을 연상시켜 그의 위선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한편 두 개의 삶이라는 뜻을 나타내 살아 있지만 죽은 행세를 하는 인물의 상황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이중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하여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의도마저 드러낸다. 즉 제목에서부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죽음을 위장한 이중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946년 11월 16일 신문기사 중 일부
해방과 더불어 우리 앞에 새로운 민족 반역의 무리가 등장하여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날뛰고 있다. 안 그래도 몹시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지경에 있던 일반 대중들은 이들 때문에 한층 더 비참한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며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것은 모리배들이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일본이 물러난 틈을 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조국이 독립되든 말든 동포들이야 굶주리어 죽든 말든 오직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한 푼이라도 더 긁어모으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대궐 같은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매일같이 값비싼 요릿집에서 잔치를 베푸는 등 그들은 국가와 민족에 크나큰 해를 끼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처벌은커녕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배를 불려 가며 수억 원의 돈을 금고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1946년 11월 16일 자 경향신문 기사내용이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국회 특별 조사 위원회가 있었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라고도 하고 이를 줄여 반민특위로도 부르는데 위원회는 초기부터 의욕적으로 친일파를 체포했다. 문인 중에는 이광수나 최남선 등 널리 알려진 친일파들이 체포되며 국민들의 높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를 새로 구성하였고 이로 인해 반민특위의 활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정치 흐름이나 기사 내용만 보더라도 나라의 형국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어지러웠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지도자의 행보에 따라 국민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