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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공간과 공감의 플롯을 통해 작가가 전하려는 말

by 깊은쌤 2024. 4. 2.

 

'그'의 집이 임 씨에 대한 의심과 갈등의 공간이었다면 형제 슈퍼는 화해와 공존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말

 

처음으로 원미동을 찾던 날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어느 겨울의 하오였다. 나는 만삭이었고 이사 날짜는 매우 촉박해 있었다. 현실이 이러했을 때는 집에 대한 낭만적인 몽상 따위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낯선 동네는 그 이름으로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그 이름은 현실에 배반당한 모든 이들에게 불씨 같은 희망을 안겨 주려고 일부러 조립한 어휘처럼 내게 읽혔고 나는 짐짓 그 희망을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원미동에서만 두서너 번 이사를 다니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아름답지만 멀어야 하는지를. 혹은 멀지만 아름다운지를. 그 깨달음의 보고서로 써진 것이 <원미동 사람들>이었다. 1992년 10월 1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양귀자 작가의 말이다. 

 

 원미동과 가리봉동

 

원미동과 가리봉동은 실제 지명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의 배경인 원미동은 서울과 거리가 떨어진 변두리 공간으로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1980년대의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와 현대화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지만 성장의 그늘 속에는 항상 소외된 계층이 있게 마련이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배경인 '부천' 역시 서울에서 밀려난 소시민들과 빈민들의 생활 터전이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서로 의지하고 또 갈등하면서 소시민적 삶을 꾸려 나간다. 가리봉동은 서울이지만 공장이 밀집한 지역으로 공장 노동자들이 주로 생활하는 곳이다.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도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공장 주인들에 의한 노동 착취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소시민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중간 계급에 속하는 소상인과 수공업자 그리고 하급 봉급생활자와 하급공무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원미동 사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소시민에 해당한다. 생계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인물이다. '그'로부터 공사를 위임받아 실행하는 임 씨는 소시민이 아닌 도시 빈민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지만 형편이 쉽사리 나아지지 않는다. 소시민인 '그'의 가족에 비해 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는 임 씨를 보며 연민과 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낀다. 임 씨는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의 공장 사장에게 떼인 연탄값을 받으러 간다. 비가 오지 않은 날에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일이 없는 비 오는 날에만 빚을 독촉하러 가리봉동에 간다. 임 씨가 받아야 할 연탄값은 어렵게 사는 그에게 한 줄기 희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이 그가 비 오는 날 가리봉동에 가는 까닭이다. 임 씨의 돈을 떼어먹은 공장 사장은 고급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자본가의 전형이다. 반면 임 씨는 지하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대비를 통해 자본가의 횡포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 찬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원미동 사람들의 어려운 삶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가리봉동을 통해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감의 플롯

 

이 소설은 공감의 플롯을 가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감의 플롯이란 등장인물이 처음에는 타인을 불신하고 이질감을 느끼다 특정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거나 자신과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점차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등장인물의 태도 변화 즉 등장인물이 처음에 가졌던 이질감이 공감과 이해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의 공감과 이해는 단순한 동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태도를 돌아보는 성찰과 같은 윤리적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타인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로널드 B. 토비아스의 저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는 플롯이 작품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가 본래 하층민인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면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하층민으로 몰락한 소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이들의 삶을 묘사한다는 점과 소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소외 계층의 삶이라는 주제 및 접근 방식 면에서는 유사하다. 소외 계층을 다룬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도 빼놓을 수 없다. 이별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가난한 농촌 여인이 이주 노동자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을 그린 작품으로 수능특강에 양귀자의 소설들과 엮어 언급되고 있다. 모두 8종의 고등문학 교과서에 고루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