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소전
충남 보령 출신의 유재필은 매사에 생각이 깊고 곧은 성품을 지녔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의 고향 친구이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특유의 붙임성과 행동으로 학교의 명물로 불렸다. 어린 시절 확성기 수리를 도우며 야당의 정치 유세를 따라다니던 인연으로 '비서관'이란 대외용 명함을 지니고 한동안 야당 정치인의 자택에서도 살았다. 그러다 오원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조사 대상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털어 봤자 나올 것이 없는 몸이었기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제대 후 군에서 배운 운전 실력으로 재벌 총수의 운전수가 된다. 그런데 그의 기질로 인해 총수의 눈 밖에 나는 사건을 겪은 후 노선 상무로 좌천을 당하고 만다. 좌천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매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말년에는 병원 원무실장으로 근무하다 6.29 선언 때 시위 중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평생을 남들을 위해 살던 그는 결국 간암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유자소전>을 지어 그를 기리고자 한다. <유자소전>은 실존했던 인물인 주인공 유재필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병폐인 물질 만능주의와 몰인정 세태를 비판한 소설이다. 이문구는 한문 산문의 '전' 양식을 계승하여 인물의 평생을 다룬 작품을 많이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자소전>이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와 같이 성 씨에 '자'를 붙여 크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전통을 이어 유재필을 유자라 일컬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작품의 서술자는 유재필의 남다른 품성과 삶을 높이 평가하여 우러른다. 그 맞은편에 이기심과 몰인정 그리고 물질주의에 갇힌 사람들을 놓아 그들의 부정적 측면을 대비적으로 부각하였다. 충남 보령 지역의 방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언어유희 그리고 반어와 대조 등의 표현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 등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유자소전>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서술자의 논찬이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롯이 더불어 산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없어라.
이시영의 시 <유재필 씨>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 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 지상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일 탈상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 산 저 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값을 깎았습니다. 돌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 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그리고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일백일 전에 세상을 떠난 광석이와 그를 묻고 돌을 세운 유재필 씨가 한강 변의 이 산 저 산에서 만나는 날입니다.
소설가 이문구
작가 김동리가 한국 문단이 얻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라고 평한 바 있는 이문구는 충남 보령 출신이다. 농민의 생활과 농촌의 모습을 특유의 충청도 토속어로 실감 나게 그려 낸다. 길고 여유로우며 리듬감이 있는 문장은 한국인의 희로애락과 해학의 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 문체까지도 농촌 공동체에 발붙인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는 산업화 시기를 배경으로 고향을 잃은 농민들의 모습과 그들이 겪는 소외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래서 이문구의 작품을 두고 산업화 시대에 새로운 농민소설의 모범을 보여 준다고도 말한다. 또한 소설가 이문구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낱낱이 쪼개진 삶과 소외받고 파편화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웃을 도울 줄 아는 유자의 모습을 소개한다. 이는 어쩌면 낯설고 의아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다시 찾은 듯 따뜻한 감동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