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
동감내기 사촌지간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집에서 나고 자랐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고 원하는 일은 일단 저지르는 몽규와 달리 동주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그는 시인을 꿈꾸지만 아버지는 의사가 되라고 한다. 동주는 아버지 몰래 계속 시를 썼지만 발표하지는 못했다. 몽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동주는 그를 부러워했다. 글을 쓰면서도 둘은 달랐다. 몽규는 인민을 변화시키고자 했고 이를 위해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명희조 선생의 영향을 받은 몽규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중국에서 마주한 독립운동가와 공산당 등의 현실은 그가 공부하고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에게 동주는 경성으로의 유학을 제안한다. 둘은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고 함경도 원산 출신의 '강처중'과 충청도 옥천 출신의 '이여진'과 친해졌다. 촌동네 출신의 순진한 동주는 현숙하고도 아름다운 여진을 사모하게 된다. 여진은 동주에게 시인 정지용을 소개해주었다. 정지용과 동주는 창씨개명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동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창씨개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이름으로 조선에 사느니 차라리 일본으로 가 지내기로 했다. 동주와 몽규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간다. 몽규는 어렵지 않게 일본 명문대인 도쿄 제국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선인 유학생들을 주도했다. 도쿄 제국대학 입학에 실패한 동주는 차선책으로 릿교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호의적인 일본인 '다카마쓰' 교수와 '후카다 쿠미'를 만났다. 그들은 동주의 시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으며 그가 시집을 출간하려는 것에 도움을 주려 했다. 조선어 원고는 가진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다시 영어로 번역해 영국에서 출간하려 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학교 수업에 난입해 동주를 핍박하고 모욕했다. 교련 수업에 빠졌다는 이유였다. 다카마쓰 교수와 쿠미는 그가 처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일본군의 핍박이 비교적 가볍다는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권한다. 이윽고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이 거의 확실해져 갔다. 일제는 마지막 발악을 위해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 징집했다. 몽규는 함께하는 친구들과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모의를 꾸미다 체포되었고 동주 역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을 앞두고 자기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수감된 죄수들에 대한 합법적인 서류를 꾸미는 것 또한 그중 하나였다. 일본 고등형사는 윤동주에게 합당한 죄목을 붙이기 위해 취조했다. 취조는 여러 차례에 걸려 진행되는데 처음에 건강했던 동주는 인체실험의 여파로 점차 피폐해져 갔다. 고등형사는 독립운동가 몽규의 활동에 그를 엮으려고 압박을 가했으나 동주는 이를 부정했다. 살아남으려고 부정한 게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 못하겠습니다." 동주와 몽규는 일제의 인체실험을 버티지 못하고 옥중 사망했다. 그들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윤동주
윤동주(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및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파평 윤 씨로 아호는 해환이다. 윤동주는 동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릿쿄 대학과 도시샤 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자아를 고요히 응시하고 사색하는 내용의 시를 통해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표현하고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했다. 1948년 유고 30편이 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윤동주는 주로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고뇌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였는데 이 같은 그의 섬세한 감성과 깊은 사색은 수필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학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자 하는 그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윤동주 수필 <달을 쏘다>
작가는 살아생전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등 총 4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 86편과 동시 34편 외 윤동주의 수필 <달을 쏘다>는 1939년 조선일보 <산울림>에 발표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던 해 쓴 것으로 고향을 떠나와 낯선 타향에서 지내는 외로움과 시대적. 인간적 성찰과 고뇌를 담고 있다. 또한 독립투사로서의 자신의 나약함과 자기 성찰도 담고 있다. 수필에서 윤동주는 가을밤의 정취를 묘사하며 달빛 아래에서 깊은 사념에 잠긴다. 그는 사랑과 고향에 대한 향수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표현했다. 특히 바다를 건너온 친구 H군의 편지를 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윤동주는 자신의 마음을 달에 투영하며 달을 향해 돌을 던지고 활을 쏘는 상상을 한다. 이는 그의 내면의 갈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고뇌와 번뇌를 깨뜨리겠다는 다짐이자 희생하겠다는 순교자적 자세를 드러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