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대한 순응과 극복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 지대에 화개 장터가 있다. 그곳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옥화의 어머니는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반해 옥화를 낳는다. 옥화 또한 떠돌이 중을 만나 성기를 낳았는데 성기의 할머니는 성기에게 붙었다는 역마살을 떼고자 그를 절로 보낸다. 옥화는 그러고도 다 못 푼 살을 풀게 하고자 성기가 장날이면 절에서 내려와 책 장사를 하게 한다. 하루는 체 장수 영감이 옥화가 운영하는 화개 장터의 주막에 계연이라는 소녀를 데려와 그녀를 옥화에게 잠시 맡기고 장사를 하러 떠난다. 책 장사를 하러 내려온 성기는 계연을 만나 은근한 호감을 느끼고 둘의 관계는 서서히 깊어져 간다. 옥화는 계연을 가까이 두어 장차 둘을 결혼시킨 후 성기가 역마살을 온전히 극복하여 정착할 수 있게 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는 계연의 왼쪽 귓바퀴에 위에 난 사마귀를 발견하고 계연이 자신의 동생이 아닐까 의심한다. 옥화는 계연이 옥화의 이복동생임을 명도에 의해 확인받게 된다. 옥화는 체 장수 영감이 서른여섯 해 전 남사당을 꾸리고 이곳 화개 장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갔다는 체장수가 본인의 아버지였음을 성기에게 알린다. 또한 계연의 왼쪽 귓바퀴 위의 사마귀로 보아 계연이 이복동생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성기에게 전하며 이로써 성기의 사랑은 운명적으로 좌절된다. 계연은 아버지인 체 장수를 따라 여수로 떠나고 성기는 앓게 된다. 병이 나은 후 성기는 운명에 순응하고 역마살에 따라 엿판을 메고 화개 장터를 떠난다.
쌍계사와 구례 그리고 유랑의 길 하동
역마의 쌍계사는 성기가 어려서부터 불공을 들여온 절이다. 화갯골을 따라 올라가면 나타나는 지리산 자락의 산사에서 성기는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바라는 대로 불공을 올렸다. 그녀들은 부처님의 자비로 아이가 떠돌이의 운명에서 벗어나 정착하고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끝부분에 엿판을 메고 운명의 갈림길에 선 성기는 집을 나설 때부터 화갯골 쪽을 등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체 장수는 계연과 함께 주막을 떠나며 여수로 간다고 했다. 화개 장터에서 구례로 뻗은 길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만약 성기가 구례로 향한다면 계연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떠도는 운명을 거슬러 정착하는 삶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기의 입장에서 계연은 이모라는 혈연관계이므로 이 모두를 알면서 계연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결국 이는 운명을 거역하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성기의 입장에서 하동은 미지의 세계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작은 인연조차 닿은 적 없는 곳이다. 성기는 이 하동을 지나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려 한다. 떠돌이 장사꾼으로서의 유랑을 시작하는 관문인 것이다. 하동을 계기로 성기는 과거와 이별하고 혈육과도 이별한다. 살던 집을 버리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역마와 같이 떠도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의 이해 및 짧은 감상
화개 장터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지역으로 여러 상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화개장터에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맺는 인간적 관계는 임시적이며 일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화개 장터는 불안정한 삶을 운명처럼 타고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역마는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될 액운이라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소재로 한 인간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그린 소설이다. 유랑과 정착이라는 대립 구도에 놓인 성기의 삶은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또한 성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있었던 우연한 만남들은 성기의 운명을 결정짓는 필연적 요소가 된다. 결말 부분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는 성기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운명관도 발견할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왼손잡이로 자식임을 의심하더니 역마에서는 귓바퀴에 난 사마귀 따위로 혈연의 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이 아무리 소설이라도 조금은 억지스럽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점을 논하기에 앞서 체 장수가 과거 본인이 하룻밤을 묵고 누렸던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모순이라고 느껴졌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부류의 소설을 놓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더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멋쩍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