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에 관한 견해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로 평가받으며 국문학사적 의의를 갖기도 하는 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그해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작품을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유연애론 등에서 엿보이는 솔직성과 섬세한 묘사 그리고 작품에서 시도하고 있는 문체의 변혁 등이 이전 소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육의 중요성과 자연 과학 수용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지점에서 계몽주의 문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 또한 받았습니다. 계몽사상은 본래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아의식에 눈뜨고 봉건적인 전근대성에 반발하면서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소설 무정에서 정혼이 아닌 자유연애를 통한 결혼관을 보여 준다거나 봉건적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던 박영채가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도주의 관점에서 자의식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언급하거나 교육으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는 발상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나는 계몽주의가 추상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당대의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추상적이며 비참한 조선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문명국에서 근대 문명을 배워 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발상이 비판의 핵심에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 문학의 경향을 가진 소설 무정은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존중하는 계몽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문학 경향의 총체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애정을 다루는 다른 방식
이전의 소설 즉 고소설이나 신소설에서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남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외적인 억압이나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을 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소설 무정이 남녀의 애정을 다루는 방식은 사랑을 성취하는데 따르는 외적인 고난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설정에 대한 내적 고민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빚어지는 형식의 갈등은 철저히 형식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외적인 억압이나 장애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 자체의 분열과 충돌로 인한 진정한 번민과 갈등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무정은 이전의 소설에 비해 애정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당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작품에서 비로소 자유연애 사상이 전면적으로 제기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정의 한계 요소
서울 경성 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 교습을 하면서 그녀의 미모에 매혹됩니다. 그즈음 형식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자신을 아껴 주던 영채가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채는 형식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 있었으나 형식의 마음은 선형에게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한편 영채는 경성 학교 배 학감에게 순결을 짓밟히고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긴 후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러나 동경 유학생인 김병욱을 만나면서 자살을 단념하고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형식 역시 선형과 약혼하고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는데 기차 안에서 병욱과 영채 그리고 형식과 선형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도중에 삼랑진에서 홍수 때문에 고생하는 수재민을 돕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우리 민족을 구할 힘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며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러한 글의 전개를 가진 소설 무정은 여러 요소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선 우연적 요소에 의한 사건 전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경성 학교 교주의 아들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자살을 택하기 위해 기찻길에 올랐던 영채가 병욱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과 더불어 각각 유학길에 올랐던 형식과 선형 그리고 영채와 병욱이가 같은 기차 안에서 만나는 것 등을 통해 우연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민중을 미개인으로 보고 그들을 깨우쳐야 된다는 자식인의 시혜적 의식과 태도가 자주 엿보였습니다. 민중의 자발성을 무시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 민족을 비하하는 면이 특히 두드러지며 이는 결말 부분에 그 요소가 짙게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을 비롯 준비론에 입각한 안창호 선생은 해당 소설이 낭만적 변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오로지 교육을 시켜 민족을 점진적으로 개화시키겠다는 생각은 비록 작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던 친일적 행위였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작가가 친일파로 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