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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았거나 쓸모가 있지 않거나

by 깊은쌤 2024. 5. 28.

가난한 지식인 P는 오늘도 일자리를 구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레디메이드인생

풍자 소설은 사회 악습과 폐단의 부정적인 면을 폭로하여 고발하는 소설을 일컫는다. 이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익살맞은 조소나 해학적인 웃음을 통한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채만식은 우리 민족의 현실에 관심을 두고 각 계급과 계층 그리고 집단이나 개인의 생활 방식을 소재로 당대 부조리한 현실을 형상화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레디메이드 인생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 다양한 태도로 풍자하였다. 예를 들어 P가 구직을 위해 찾아간 신문사 사장과의 대화에서는 1930년대 농촌 계몽 운동의 본질을 드러내고 술집 여자와의 만남에서는 돈을 위해서라면 정조도 쉽게 생각하는 현실 등을 여지없이 풍자하였다. 이처럼 레디메이드 인생은 사회의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억압 정치가 노골화되던 시기로 조선 농지령 공포에 의해 경제 수탈은 가속화되었으며 그 수탈에 의해 몰락하는 지주가 속출하였다. 붕괴된 경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설 자리를 잃고 고등 실업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기를 대변하는 레디메이드 인생은 사실상 채만식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당대 실상을 구체적으로 그려 낸 것이다. 작품은 주인공 P를 통해 나타난다. 사회에 적응하여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받아 줄 곳이 없는 현실에서 지식인은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엄혹한 시대를 작가의 방식으로 풍자한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레디메이드라는 말은 이미 만들어진 제품 즉 기성품이라는 뜻으로 누구에게 팔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기성품 인생을 의미한다. 레디메이드 인생은 좁게는 식민지 시대 양산된 무직 인텔리 계층을 의미하며 넓게는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 전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무쓸모 인테리 지식인 P

작품에서는 P와 같은 무직 인텔리들이 양산되는 원인을 총독부의 문화 정책에 따라 각종 교육이 확대되었던 현실에서 찾고 있다. 학교가 증설되고 보통학교 교장들은 입학을 권유하러 다녔으며 청년회에서는 야학 설립의 방법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로인해 P처럼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증을 가진 인텔리들이 양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충족되지 못하면서 P와 같은 고학력 실업자들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P나 A 또는 S와 같이 이니셜로 설정하여 익명성을 띠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이 특정한 이름을 가진 개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과 연결된다. 작가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 등장인물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즉 개개인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 그리하여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바라는 의도를 담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자의적이며 타의적 잉여인간

치과 의사인 서만기의 병원에서는 그의 친구들인 채익준과 천봉우가 매일 찾아온다. 익준은 사회의 부조리를 담은 신문 기사를 보며 분노하고 봉우는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생활한다. 또한 매사에 무기력한 채 간호원인 홍인숙을 짝사랑하여 그녀를 쳐다보거나 앉아서 낮잠을 잔다. 봉우의 아내는 병원 건물의 소유주로 가난한 치과 의사 만기를 돈으로 유혹하려 한다. 봉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만기는 일주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 달라는 봉우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익준이 없는 사이 익준의 아이가 병원으로 찾아와 익준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전한다. 만기는 봉우의 아내에게 장례 비용을 융통하여 익준의 아내 장례를 치르고 장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익준을 만난다. 아이들이 매달려도 그는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다. 손창섭의 잉여 인간은 6. 25 전쟁 이후 전란의 후유증으로 인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전후 소설이다. 주인공 만기의 치과 병원을 배경으로 하여 만기와 그의 친구들인 익준과 봉우 등이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현실에 무능력한 잉여적 인물형들을 그려 낸다. 만기는 다양한 예술에 대한 이해와 고급한 감상을 갖고 의리감과 인정미를 지니고는 있으나 현실에서는 5평도 안 되는 치과 병원을 운영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한편 봉우를 통해서는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불안한 긴장상태로 지냈던 것이 고질화 된 인간형을 제시한다. 익준은 아이들의 고무신을 사 들고 오지만 그것은 익준의 가련한 인상일 뿐 그가 생활인으로 사회에 적응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작가는 도덕성이나 선량함보다는 경제적 능력이 우선시되는 전후의 부조리한 세태를 폭로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현실을 휴머니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소위 말해 지금의 MZ세대도 소설 속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을 위한답시고 만든 고학력 중심 사회가 지금의 청년 세대를 이토록 옭아 맨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