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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의 획을 그은 작가 이상의 작품들

by 깊은쌤 2024. 4. 5.

1936년 9월 잡지 조광에 실린 작품 <날개>이다.

 

산촌 여정

 

이상이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방문했던 평안남도 성천에서의 경험을 쓴 수필로 이때의 경험은 수필 <권태>에도 드러난다. 1937년 동경으로 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집필한 <권태>에 나타난 산촌의 단조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성천이라는 공간은 매우 서정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도 늦은 밤 쇠약해진 몸과 가족들에 대한 근심에 휩싸여 있는 지식인의 위태로운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히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산촌의 생명력과 정열을 도회적 감각으로 포착하고 있는 글쓴이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수필로 손꼽힌다. 일찍이 도회인 경성에서 태어나 모더니스트의 감수성을 지닌 이상에게 한가로운 산촌의 풍경은 매우 낯설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도회적 감각과 기억이 산촌의 자연적 풍경이 뒤섞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글쓴이는 성천의 자연 속에서 도회를 화려한 고향으로 느끼며 도회의 소리들과 향기들을 추억처럼 소환한다. 고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도시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 것이다. 산촌의 풍경 속에서 마주한 노란 옥수수 밭의 '관병식'과 뽕을 따는 처녀들의 정열 그리고 대지를 뚫고 흐르는 시냇물의 색채 이미지는 글쓴이가 자연에서 발견한 생명력과 연결된다. 작품 속 자연 풍경들은 글쓴이의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언어와 만나 매우 참신한 표현으로 거듭나고 있다. '오렌지빛 여주'나 '스파르타식 꿀벌', '아스파라거스 잎사귀 같은 화초'와 같은 표현은 자연적 대상인 식물과 동물 등이 외래적 수사와 만나 매우 새로운 언어적 감각을 형성하고 있는 예이다. 특히 색채 이미지와 같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후각, 미각의 표현 또한 자주 등장하는데 향기로운 엠제이비(MJB)의 미각을 비롯해 벌레 울음소리, 맥박 소리 그리고 등잔 기름 냄새 등을 다양한 수사법과 감각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수사학의 보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날개

나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방 안에서 뒹굴며 지낸다. 아내가 외출할 때면 나는 아내의 방에서 놀곤 한다. 아내에게 내객이 찾아올 때면 아내는 나에게 은화를 준다. 나는 은화를 저금통에 모두 두다가 변소에 빠뜨린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나는 내객과 함께 있는 아내를 보게 된다. 이후에도 가끔씩 외출을 하던 나는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다. 아내는 나에게 아스피린을 주고 나는 그것을 먹고 잠만 자게 된다. 나는 아내가 준 약이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고 외출하여 거리를 쏘다니다 미쓰코시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리자 나는 날개를 날아오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작품은 이상의 실험적인 서술방식과 파괴적인 형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보통의 남녀 관계와 달리 역전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기생하고 있는 나의 유폐된 삶이 아내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공간적 분할과 차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빈둥대다가 거리를 쏘다니고 티 룸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나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나가 아내에게 받은 돈을 버리고 일종의 탈출의 성격을 지닌 외출을 하면서 자아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날개가 돋기를 염원하는 것은 무의미한 삶의 도정에서 생의 의미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권태

한여름 시골의 벽촌에 머물면서 겪은 농촌의 자연과 생활 풍경을 진솔하게 서술한 수필이다. 도회지에 사는 글쓴이가 한여름의 시골 생활을 통해 몸소 느낀 것은 자연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과 농촌 생활의 편안함이 아니라 단조로운 풍경과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과 권태뿐이다. 글쓴이는 도회지와 대비되는 농촌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시골과 도회 생활의 장단점 그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삶의 여러 본질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글쓴이는 자신의 권태를 표현할 때는 심리주의적 탐색 방식을 농민과 자연의 권태를 표현할 때는 상식적. 피상적 관점을 벗어난 독창적이고 참신한 관점을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수필이 취미나 교양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진지한 문학 양식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