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원고지의 다양한 특성
1960년대 이근삼의 등장은 비교적 고루하고 무거웠던 극장 무대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정통 리얼리즘 극을 고수하고 있던 기존 작가들의 사실 집착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서사적 수법과 우화적 수법 그리고 표현주의적 수법과 더불어 극적인 아이러니의 수법 등 다양한 형식을 참신하게 보여 주었다. 또한 과거의 희극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적 희극 형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양식적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작품 원고지는 1960년 1월 <사상계>에 발표한 국내 데뷔작으로 끊임없이 원고를 번역해야 생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대학교수가 극의 주인공이다. 그의 가족 그리고 교수에게 번역 원고를 독촉하는 감독관의 모습을 통해 방향 감각과 도덕적 판단을 상실한 채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한다. 또한 무대 장치나 극의 분위기 및 대사와 인물 설정에 이르기까지 부조리극과 표현주의극의 특징도 잘 보여 주었다. 주인공인 중년 교수와 그의 처 그리고 장남과 장녀 등 이름 없는 이 한 가족은 현대 산업 사회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미마저 상실한 채 기능한 비대해진 가족 단위의 대표 격으로 이를 무대화하기 위해 특히 표현주의적인 수법이 활용되고 있다. 무대의 표현주의적 양식은 소파 커버의 원고지 무니와 워고지를 곧추세운 것 같은 벽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원고지 칸 그대로인 벽의 무늬 등은 그 활용이 두드러진다고 이해되며 소파 뒤 막대기엔 굵은 줄이 칭칭 감겨 있어 외출에서 돌아온 교수가 차고 있던 철쇄를 풀고 대신 이 줄을 허리에 감도록 고안되었다. 이는 교수를 괴롭히고 있는 생존의 압박을 상징적으로 가시화해 주고 있다. 공간 활용의 자유로움 뿐만 아니라 무대 장치에 동원된 상상력 자체가 환각주의를 거부하고 있는데 개막전 무대 전면 중앙에 선 장녀의 해설을 시작으로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방을 생각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이근삼의 희곡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설자는 관객의 상상적 참여를 요구하는 형식인 동시에 말해진 것과 표현된 것 사이의 괴리를 통해 연극적 아이러니를 창출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것은 서사극적인 원리를 활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과장된 인물의 외양을 통해 현대 사회의 향락적이고 경박한 풍조를 적절히 반영하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 교수의 성격은 꿈의 형태를 빌려 이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점은 주인공이 가진 과거의 희망과 정열의 화신으로서의 천사 그리고 원고를 독촉하는 지옥의 사자를 감독관으로 이를 극명하게 대조해 드러낸다. 이렇듯 작품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혼돈을 초래하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무기력을 드러내는 부조리적 성격이 강조된 희곡이다.
몸뚱이가 없는 북어대가리
희곡 북어대가리는 자앙과 기임이라는 두 창고지기를 통해 획일화되고 기계적으로 분업화된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두 인물은 창고에서 매일 상자를 쌓아 올리고 트럭에 실어 보내며 커다란 구조 속의 부속품처럼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자기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어려운 현대인의 단면을 떠올리게 된다. 자앙은 창고지기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인물이다. 이에 비해 기임은 상자들을 관리하는 일은 대충 처리하고 당장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현재의 삶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다. 창고지기 생활에 염증을 느낀 기임은 배달할 상자를 고의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큰일이 생길 거라는 자앙의 걱정과 달리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자앙을 남겨 두고 기임은 다링과 함께 창고를 떠난다. 이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던 자앙의 신념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런 흔들림 속에서도 자앙은 결국 그동안 해 온 것처럼 기계적으로 상자를 쌓는 일을 되풀이한다. 작가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의혹을 품게 되는 자앙의 인식을 북어 대가리를 통해 드러낸다. 몸뚱이는 없고 머리만 남은 북어 대가리는 생각만 가득한 무기력한 인간을 상징한다. 작품은 상품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독특한 소재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창고라는 제한된 공간과 짐을 쌓고 내리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 그리고 익명성을 강조한 등장인물의 명칭 등을 통해서도 폐쇄적인 현대인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 현대 극문학의 변천사
한국 현대 극 문학은 개화기 이후 창극이나 신극 등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토월회와 극예술 연구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면서 근대적 작품들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이후 사실주의 극문학과 해외 번안과 번역 작품 등이 주류를 이루며 이런 흐름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진다. 1940년대에서 1960년대에는 전후 현실을 다루거나 현대 자본주의의 속물성과 구시대의 인습 등을 비판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서구의 사실주의 및 실험적 표현 기법이 활발히 도입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 및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과 역사 문제 등을 다룬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마침내 전통적인 연희 양식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통 제의인 무당굿을 계승한 굿극과 가면을 계승한 탈춤극 그리고 전통을 폭넓게 계승한 마당극 등이 유행하며 현대극의 새로운 양식이 발전하기까지 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주로 사실주의 사조를 기본 방향으로 하되 현대극의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수용하여 표현의 영역을 확대하는 시도가 더해졌다. 상징적이거나 시적인 분위기가 가미되고 플래시백 수법을 통한 자유로운 시공간의 넘나듦 등으로 극 문학에서도 유연하고 개방적인 특성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렇듯 문학은 세대와 시대를 거쳐 깊이 있게 거듭났다. 참으로 멋있고 맛있는 문학이다.